그렇게 암울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그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기력을 찾고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. 나를 한없는 절망의 끝 언저리에서 건져 준 것은 여동생 한이숙이 넣어 준 한 권의 책이었다. 그 책은 본훼퍼의 옥중서간집이었다. 디트리히 본훼퍼,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이다. 나찌 정권에 대항하다 결국 게슈타포에 붙잡혀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지만 종전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끝내 총살을 당한 실천적인 종교인이었다.
"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, 내가 매 맞는 것, 내가 죽은 것,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.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,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."
본훼퍼의 이 한마디는 나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건져 올려주는 동아줄이 되었다. 나의 처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고통을 이겨 내어 결국 승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본훼퍼의 글은 너무나 큰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왔다.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.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면 다시 읽곤 하였다. 특히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날은 꼭 그 책을 읽고 마음의 무장을 다시 했다.
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발작처럼 찾아오는 호흡 곤란증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. 겨울은 깊어만 가고 교도소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왔다.
1979년 12월 24일 성탄전야. 내 인생에 차마 잊혀지지 않는 소중하고 고귀한 성탄전야이다. 성탄이 다가오자 나는 더 외로워졌다. 가족과 동지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. 나와 같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을 남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. 난 그리움이 얼마만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.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. 목젖이 울컥거리며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.
그 때 꿈결처럼 아득한 울림이 들려왔다. 그 울림은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.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울려오고 있었다. 난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.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를 따라 방 옆에 붙어있던 악취 풍기는 변소로 들어갔다. 두 손으로 옥창의 창살을 부여잡고 세상 밖으로 귀를 내밀었다. “한명숙, 한명숙. 힘내라!”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. 수인번호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나, 한명숙을 부르고 있었다. 나를 부르는 그 소리는 겨울바람에 실려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며 나의 귓전을 힘차게 울렸다. 동지들이었다. 내가 사랑하는, 나를 사랑하는 동지들의 목소리였다. 동지들은 성탄 새벽, 교도소의 뒷산에 올라 갇혀있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한 사람, 한 사람의 이름을 합창했던 것이다.
조금 후 멀리서 옥에 갇힌 우리를 위해 불러주는 동지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성탄의 새벽을 잔잔하게 깨우고 있었다. 나는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성탄 메시지를 들어 본 적이 없다. 한명숙! 이 이름 석 자에 담긴 동지애가 빛을 잃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좌절해 있던 나를 극적으로 소생시켰다. 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옥방의 창살에 매달려 그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탄의 새벽을 맞았다. 나는 그 날 나를 불러 준 동지들의 목소리에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내 곁으로 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. 그 이후 나를 짓누르던 외로움과 호흡곤란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.
'[Why 한명숙] > 미니자서전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[미니자서전 3 ]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일어서라 (10) | 2008/03/20 |
|---|---|
| [미니자서전 4] 고문과 절망 (2) | 2008/03/20 |
| [미니자서전 5] 구원의 소리 (3) | 2008/03/20 |
| [미니자서전 6] 5월의 붉은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(2) | 2008/03/20 |
| [미니자서전 7] 노란손수건 (2) | 2008/03/20 |
| [미니자서전 8] 쏘지마! 쏘지마!! (2) | 2008/03/20 |















동지들의 캐롤..글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물이 울컥 흘렀습니다.
오타가 있으신 것 같아 말씀올려봅니다. "나와 같은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잊을 남편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." 에서 "보내고 잊을"이 아니라 "있을" 이 아닌지요.. 님의 건강과 복록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. 국민의 뜻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..
이런 글 읽으면서 눈물 속에서 오타 찾아내시는 채운님..
정말 대단한 디테일이시군요
값자기 눈동자 주변에눈물이 맻히는군요 절망적일때자기를알아주는 가람들이야말로 평생잊을수가 없다고생각합니다 저도그런경험이조금있어서잘알고있읍니다 얼마나우셨을지짐작이 충분히갑니다 하지만옆에여러사람이 있다는것을알아주시면감사하겠읍니다